시크릿 가든 다음으로 몇 번을 잠겨서 본 시리즈가 아닌가...
내가 왜 이렇게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나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제대로 된 애도의 형식을 갖춘 이야기에 매료된 것 같다.
매료라는 말을 쓰기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이건 결국 매료가 아닌가.
(먼 미래에 기억력이 감퇴했을 나 자신을 위한 Spoiler Al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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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시리즈를 볼 때에는 시즌3 자체에 크게 분개했다. 가해자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설정이었으니까.
다시 보면서는... 오히려 이 시리즈 제작진의 신념에는 일관성이 있다고 느꼈고, 그 신념에 의해 희생된 듯 보이는 브라이스보단 몬티의 결말 때문에 화가 났어.
시즌4를 위한 밑밥이었다고 쳐도, 우리가 몬티를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게 맞나? 악인에게, 그 악인의 벌어진 상처에 그가 저지르지 않은 일까지 쑤셔 넣어서 그를 보내버리는 것이. 심지어 그 악인조차 이 시리즈가 그토록 '나아질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불운한 청소년인 것마저 인정하면서. 이 극에서 다뤄지는 죽음들이 모두 너무 유사성이 강해서, 이렇게까지 죽음이 난무하게 만들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되었달까. 그러니까, 브라이스도 몬티도 너무 손쉽게 "처리"된 느낌이라는 점이. 마치 아무리 참회해도 결국은 자기가 쌓은 업보에 따른 잔인하고 냉혹한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엉성하게 위장해선. 그 시리즈는 그런 얘길 하려던 게 아니지 않아? 사실 해나의 죽음도 정말 한없이 안타깝고 애달픈, 아무리 손을 뻗어도 붙잡을 수 없는 그 허망함으로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는데, 이런 죽음은 해나 하나로 끝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 시리즈가 그 안의 아이들이 모두 '아이들'이며, 사람은 누구든 더 나아지려는 의지를 갖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그러니까 살아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했다면.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브라이스와 몬티를 이용해 버린 느낌이랄까. 그래 꼭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이를 희생시키는 편이 쉬웠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뿐더러... 악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느껴야 하는데? 내가 어떤 비통한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부정하고 싶은 상황 속에 놓인 피해자들은 그 죽음이 이중으로 힘들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죽음은 무거운 거잖아. 죽음은 어떤 면죄부도 되지 못해. 그러나 죽음으로써 무언가를 치러버린, 모든 가능성을 박탈당한 한 인간을 어떻게 그 전과 같이 미워하고 단죄해. 악인의 죽음은 그가 속죄할 기회를 소거할 뿐 아니라 피해자들이 단죄 혹은 용서할 기회마저 없애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무게는 고스란히 생존한 사람들이 감당, 혹은 소화해야 할 몫으로 치환된다.
그럼에도 나는 브라이스의 죽음을 헤쳐가며 그가 마지막 나날들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았는지를 짚어간다는 점에서 조금은 흐린 눈을 해보려고 했거든. 그런데 몬티를? 그럴 듯한 사연과 비극성까지 부여해 놓곤? 그런 몬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걸 클레이가 방조했다고? 클레이의 가장 큰 강점은 아무리 싫은 사람에게도 모종의 정의가 닿도록 애쓴다는 점이잖아. 배타적인 영웅컴플렉스에 빠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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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3의 가장 큰 문제점은 클레이가 너무나 시즌1, 2 속 클레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건 (클레이를 잘 모르는) 아니의 시점이 이야기를 끌고 간 탓도 있을 것이고, 제작진의 판단으로 클레이의 캐릭터를 무너뜨린 탓도 있을 것 같다. 그냥 평범한 10대처럼 질투에 사로잡히고 눈이 멀기도 하는 청소년으로 그리고 싶었던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그게 맞나? 클레이가 드라마 후반부에 묘사된 사람만 같았더라면 해나는 클레이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클레이는 결코 평범한 10대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불안장애를 겪어왔다는 설정부터 클레이는 다른 10대 또래들과는 다른 출발선에 선다. 심지어 그 배경을 떠나서도 클레이는 훨씬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이었잖아. 자신 만의 어떤 상이 있고, 질투와 불안을 강하게 느끼는 캐릭터일지언정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이었잖아. 그러니까 저스틴도 잭도 타일러도 클레이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거잖아. 해나와의 사건이 클레이를 바꿔놓았을 걸 감안하더라도, 굳이 클레이를 이렇게까지 바보로 만들어야만 했나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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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는 이 시리즈 몇 번을 다시 봐도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고, 그 점은 아니에게도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해서 들려주는, 외부인. 남의 말을 옮기면서, 마치 자신은 외부인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구술하는 아니. 아니는 이 시리즈의 메기였고 나는 메기가 싫었다. 문제는 시리즈 내의 아이들은 아니를 친구로 받아주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인데. 아이들은 전학생과 금방 친해질 수 있지만 이 아이들도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또 아니는 정말 이 아이들의 사회에 충분히 녹아들었는가? 하는 의문이 내게 남는 것이다. 아니가 잃을 것이 있었던가? 아니는 어떤 면에서 토니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이주민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토니보다 더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였을 것이다. 이런 삶의 배경을 포함해 가장 큰 두려움이 엄마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들키는 것인 아니가 다른 아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고민하고 분투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친구관계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다. 외부인이기도 하고, 어쩌면 다른 아이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건 친구관계가 아니에게 있어 크게 대수로운 고민은 아니었다는 부분에서, 아니는 다른 아이들보다 강한 존재이지만 결국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과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방인이었어. 난 이게 연출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마치 아니 역시 이 아이들 중 하나가 된 것인양 위장을 하면서 불협이 발생한게 아닌가.
예를 들어서... 아니는 제시카에게 자신과 브라이스의 관계를 털어놓으면서 "친구인 너에게 너무 미안하고 잘못했다. 네가 친구라서 털어놓는다"고 말한다. 나는 사실 여기까지도... 왜 굳이 그걸 털어놓지? 저런 얘길 꼭 할만큼 제시카와 긴밀하게 지내지도 않던 중이었고, 저 사실을 털어놓든 털어놓지 않든 아니에겐 그닥 큰 죄의식이 있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고백 직후에 제시카의 반응 한마디가 있기도 전에 아니는 이어서 말한다. "너도 너의 가장 어두운 비밀 / 최악의 실수를 내게 털어놓지 않을래?" 나는 이게 정말 교활한 화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친구 남자친구를 뺏은 것도 아니고, 브라이스와 친하게 지낸 것을 후회하지도 않고, 정직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제시카를 절대 잃을 수 없는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일(제시카 중심으로 본다면 ‘친구를 성폭행한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 본인 중심으로 보자면 ’죄를 참회하고 있는 범죄자‘와 친구가 된 것)을 마치 자신의 일생일대 가장 큰 실수인 것처럼 말하면서 제시카에겐 너 사람 죽이지 않았니 나한테 털어놔봐 하고 말하는 거야... 너무하잖아. 내가 아는 제시카라면 황당해하면서 아니에게 선을 긋고 그 자리를 떠나고 아니를 싫어하며 지냈을 텐데 놀랍게도 제시카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자백을 종용하길 기다렸다는 듯 아니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가... 너무 면밀하고 촘촘하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뒤로 갈수록 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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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즌4를 보기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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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스틴의 죽음 같은 걸 나는 본 적이 있다. 언제냐면 비밀의 숲에서 영은수. 힙하게에서 김선우. 내내 고통만 받다가 이제야 좀 빛을 향해 나아가려던 찰나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고 스러지는 무력한 죽음을 왜 내가 가상현실 속에서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스러져가는 저스틴 곁에서 클레이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못됐다. 클레이 역시... 그럴 수 있는, 덜 자란 아이니까. 그렇지만 왜 그 모습을 형제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켜야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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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전 시즌을 다시 한 번 끝마쳤다. 시즌4는 정말 엉망이었다. 여러모로 모든 것이 과했고, 극단적이었어. 앞에 세 시즌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충분히 그랬는데... 서사가 어느 고점을 지나고도 내려가야 하는 시점을 잃어버리면 어떤 종류의 Walkout이나 반달리즘을 보여주는 건 미국 드라마들의 클리셰인가. 오뉴블을 떠올리며 적는 문장이다.
나는... 그래도 그 애들의 졸업까지 지켜볼 수 있었던 것에 약간의 의미를 두기로 한다.
욕을 잔뜩 해놨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정말 사랑한다. 한 인물의 죽음을 이토록 긴 시간에 걸쳐 이토록 샅샅이 들여다보며 애도하는 것. 애도와, 애도의 형식과, 애도에 들이는 시간과, 그 끝에서 살아보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그걸 내게도 절절한 경험으로 안겨주는 이야기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