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에 해당되는 글 140건
- 2023.02.23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 2023.02.08 아마도 나는 머지 않아
- 2022.11.22 Knight Verse Teaser
- 2022.11.20 어떤 방주
- 2022.09.10 고통은 영원하다
- 2021.06.03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하는 생각
- 2021.04.29 오랜만의 일기
- 2018.07.18 영원을 믿지 않아도
- 2016.09.01 돈 벌고 싶다
- 2016.06.08 귀국했다
아마도 나는 머지 않아 기억을 잃고 총기가 스러지며 서서히 시들어갈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이 들며 흔히 겪는 퇴행이 일찍부터 찾아와 남에게 불편을 끼치고 지금보다 더 부끄러운 삶을 지겹게 끌다 죽게 되겠지 그게 싫어 일찌감치 죽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살수록 어제의 내가 부끄러워 조금이라도 만회해놓고 싶다는 애처로운 마음이 매일을 연장하는 듯 하다 그래봤자 쌓이는 것은 나아지는 것 없는 나의 역사와 어김없이 따라오는 수치심 그리고 점점 진행되는 퇴행 같은 것… 기록되지 않은 삶은 없던 것과 같다는 카뮈의 말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 오랫동안 나를 기록하려고 애썼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내 삶에 그럴 가치가 있을까 나의 편협한 세상 안에서 내가 이 머리통을 굴리며 하는 고민과 생각들이 이 우주에, 그러니까 더 구체적으론 이 사회에서, 지구에서, 태양계에서, 우리 은하에서, 그러니까 우주 전체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것이다 오직 나에게만은 온 우주나 마찬가지인 나의 삶에 관해서만 의미를 가질 나의 슬픔과 나의 고통 나의 불행 나의 잘못 나의 딜레마들… 그러나 그런 나 하나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과 그에 따른 절망들 그저 보잘 것 없는 나 하나를 포기하면 쉬워질 많은 것들 나를 포기 못해 내가 매일 치르는 어떤 이별들에
날이 좋아 북촌을 걷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최우람 작가의 작은 방주를 보러 갔다.
근 몇 년 간 국내 설치미술을 보면서 이렇게 충격받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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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이블이란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그 테이블을 짊어지고 선 지푸라기 인간들이었다. 너무, 너무 고단하고 처절해 보였다. 고작 지푸라기가 앉았다 일어나면서 그렇게 온 몸을 부들부들 떨 일인가. 있지도 않은 힘줄이 불쑥 솟고, 나지도 않는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버거운 압력에 질끈 악문 입과 불행한 표정까지 모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구체가 그들이 갖지 못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머리라는 것을 몰랐고 그저 이 인간들이 저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죽도록 애쓰고 있는 꼴로 보였다. 저렇게 안간힘을 써서 버티는데 그렇게 해서 고작 하고자 하는 일, 혹은 하고 있는 일은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현재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 뿐이라니. 그리고 저 자리에서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 존재 하나만 빠져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이 벅찬 무게의 테이블과 가까스로 균형을 이룬 듯 보이니까.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겨우 버티고 막아 선, 자의인지 타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론 끝을 알 수 없는 노예 노동이 된 저 광경을 내려다 보는 검은 새들이 있었다. 나는 이게 인간의 삶 같아서 정말 슬프고 불행하고 비참한 묘사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이름이 더 테이블이며, 그들이 굴리는 공은 '머리'이고, 테이블을 짊어지고 선 머리 없는 인간들은 그 하나뿐인 머리를 갖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는 작품 설명은 그 뒤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게 뭐람. 쟁탈전이라 해도 그들은 너무 지치고 불행해보이고, '쟁탈전'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내가 뭔가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갖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체념이 된 듯 보였다. 그러나 버티고 선 것 자체가 이미 어떤 투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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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전시는 끝없이 피고 지는 흰 꽃과 빨강. 무엇보다 빨강. 피어날 때는 이쯤에서 다시 시들 듯, 이번에는 이대로 저버릴 듯, 혹은 여기까지가 끝인 듯, 머뭇거리길 반복하다 끝내 만개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시들 때에는 머뭇거림 없이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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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들이 인상적이었으나 내가 가장 심한 감정소모를 하게 만든 작품은 작은 방주였다.
방주만 볼 때도 압도적이었는데, 공연과 함께 보다보니 비로소 무언가 완성되는 느낌이 들어서 적어두고 싶었다.
고개 숙인 천사가 마치 죄인을 매단 듯 어둠 속에 걸려 있고, 무슨 근거인지 모를 확신으로 등대를 등지고 앉아 각자 반대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는 방주의 두 선장은 어쩐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위압적이고 지시적인 손가락과는 대조적으로 시선이 묘사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처음부터 불길해보이는 방주가 움직임을 시작했을 때, 방주를 이루고 있는 박스 조각들은 울타리 같기도 날개 같기도, 혹은 덫 같기도 하고 칼날 같기도 했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공연단은 더 테이블에서 먼저 의식을 시작해 방주로 넘어왔다. 공연은 국악과 실험음악이 접목된 소리와 현대 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제정 시대 인류와 같은 복식을 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마치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듯, 신을 모시는 듯한 형식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나는 더 테이블 공연을 조금 보다가 그만두고 방주로 먼저 이동했다. 공연이 즐겁지 않았다. 각자 자기와의 싸움 중인 시지프스 같은 형상의 지푸라기들 주변을 돌며 그들의 분투를, 그 머리가 누구에게 갈지를 구경하는 역할 외에 저 신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응원하기? 기원하기? 그래서 음악과 춤이 그럴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두는 역할로 그친 것 같아서. 무엇보다도 인간이 생명이 깃든 육신을 이용해 보여주는 몸짓이, 좌중을 압도한 어떤 사물을 꾸미는 장식에 머물고 마는 것을 보는게 나는 싫었다. 그건 사실 방주 공연 초반부에 더 심했다. 더 테이블에서는 지푸라기들이 인간의 형상을 갖고 인류에 대한 은유 또는 인류를 닮은 신화적 존재처럼 기능하다보니 그 주변을 둘러싼 다른 (그들보다 하위 존재로 보여지는) 인간들이 보내는 생명의 몸짓들이 그저 사족처럼 느껴져 거추장스러운 정도였다면 방주에서는 본격적으로 불편했다. 방주는 사물이다. 사물을 두고 이루어지는 생명의 구애는 생명의 타자화를 수반할 수 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공연을 다 보고 나니 그게 의도된 불화였던 것 같기도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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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대하고 교교한 방주. 홍수 속에서 선택받은 생명들을 구한 방주. 신의 배. 기술의 집합체.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믿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떤 약속. 2022년 인류에게는 자본일 수도, 기술일 수도, 어떤 허황된 관념과 선동으로 그칠지도 모르는, 미지의 구원 같은 것.
그런 방주를 숭상하는 듯 보이던 무용은 어느 시점엔가 시위로 바뀌었던 것 같다. 아, 그랬지. 사람들의 욕망이 움직이는 기제가 있지. 애원이 끝나고 찾아오는 것은 분노지.
사람들은 방주에 깃들고 싶다. 방주의 날개 아래 깃들어 방주가 자신을 품어주길, 또 방주에 태워서 이 곳으로부터 구원해주길, 끝없이 그리고 무턱대고 염원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도 받아 달라고 방주를 향해 아우성치는 공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비참해졌다. 인간은 너무 바보같아. 저 방주가 날 구원해줄거란 보장도 없는데 뭘 믿고 그 날개 아래 스며들고 싶어하는 건지. 얼마나 절박하면 그럴 수 있는지. 여기서 보면 한없이 위험하고 불길해 보이는 저 방주 앞에서, 우리도 데려가라고 매달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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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결말은 이랬다. 어느 샌가 방주는 날개짓을 멈추었고, 오른편에서 방주를 향해 시위하던 인간 아홉명은 서서히 방주 왼편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내내 독무를 추던 여자와 조우하고 그를 에워싼다. 그렇게 이 작품은 결국 인간에게는 인간 뿐이라는, 인간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인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했어.
방주가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람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인지, 혹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눈을 돌리며 방주의 날개짓이 멈춘 건지 선후를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 차이는 무척 중요하고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 만이 유일하게 인간이 가진 선택지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어떤 선택을 하든 결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인간에게 인간 뿐인 거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면. 그렇지 않음을 아는 것이 나의 관할이 아니라면. 나는 선택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내가 선택을 내리고 싶어. 내가 확보할 수 있는 한 줌 유일한 존엄이 그거라면 난 나의 존엄을 선택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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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키아즈마 미술관에서 바벨을 모티프로 삼은 '어웨이크닝'이란 작품을 본 이후로 쭉... 이상하게도 드라마 '다크'와 유사한 그림자가 나와 내 삶에 드리운 시기란 생각이 든다. 북유럽이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시벨리우스 조각상도, 헬싱키 로컬도 아닌 미국인 기타리스트가 보여준 연주도, 이번 국현미에서 본 작은 방주도 모두 어떤 종말의 한 조각을 품고 있는 느낌.
그게 팬데믹의 영향이라는 것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집에 오는 길에 다크 제작진이 새로 선보이는 시리즈가 공개됐단 소식을 들었다.
2022년이 저물고 있긴 한가보네.
고흐의 유언을 듣고 등골이 서늘했다 고통이 영원해서 그 고통을 끝내고 싶었던 의지였는지 이 육신은 저물겠지만 고통은 영원할 것을 안다는 체념이었던 건지 모르겠어서 어느 쪽이든 이 생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단호하게 닫는 언명이어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하는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돌아보고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아가기 직전의 림보에 갇히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쩌면 이미 갇혔기 때문에, 혹은 안간힘을 써가며 그 길고 어두운 통로 빠져나오면 또다시 갇히는 굴레가 수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도 같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어느 순간 이만큼 나와있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고 나는 또 다른 수렁에 빠져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나는 밝고 활기찬 사람이었는데.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미래를 기대하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불확실성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빛나는 것들을 좇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토해내듯 건설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의 나를 모르겠다. 내가 쓰고 있는 내 시간들에 대해 나는 자격미달 같다. 여전히 나는 초라해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인데, 어느 순간 초라한 나를 받아들이게 될까봐, 두렵다. 그걸 두려워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내가 또 초라해지고, 두려움을 느끼는 내가 초라하고 내가 탕진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미안하고...
반려인이 일기를 쓴대서 나도 일기를 써본다. 반려인은 내게 늘 이렇게 영감과 에너지를 준다. 나의 아침은 아주 짧다. 나는 잠귀가 밝아 아주 작은 알람소리에 잠이 깬다. 하지만 잠을 이기지는 못해 눈을 감은 채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거나 한참을 이불속에서 밍기적대다 일어난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건 집을 나서야 하는 시각으로부터 10분이 남았을 때다. 세수하고 이 닦고 로션 바르고 옷 갈아입고 머리 빗고 나갈 준비를 마치면 사실 10분은 이미 지나 있다. 그러고 거실로 나서면 민채의 빈 밥그릇과 물그릇이 보인다. 그럼 민채를 챙기고 여기저기 간식까지 숨기고, 반려인이 내려주고 간 커피 텀블러를 도시락처럼 챙겨 집을 나선다. 그래서 거의 항상 회사에 10분 이상 지각한다. 야근이 잦아 그런가 출근 시간이 비교적 엄격하지 않은 분위기의 업종에 일하는 것이 다행이다. 어쩌면 엄격한데 나만 눈총을 사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런 업종이기에 내가 직장으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지.
요즘은 내가 몸이 나빠진 것이 확연히 느껴져서 반려인에게 커피를 챙겨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자주 마시진 않았다. 좋아하는 만큼 좋은 커피,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게 좋았고 굳이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커피를 사 마실 필요를 느끼진 않았다. 게다가 커피에 영향을 많이 받아 커피를 마시면 자주 배가 아프거나 가슴이 뛰고 손을 떨곤 해서, 커피를 마시는 건 나에게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기회 같았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서 2년 차쯤 되었을 때 내겐 그런 증상이 모두 사라졌고 요즘 나는 프랜차이즈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있다. 그러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느낀 건 3년 차 즈음, 그리고 지금은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낀 상태다.
나는 무엇에든 뛰어들어 최대속력으로 질주하고 방전되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반려인은 그 완급조절이 나보다 훨씬 잘 된다. 신기하게도 본인이 해야 하는 일, 좋아하는 일에 무섭도록 몰두하지만 나처럼 나가떨어지는 상황을 만들진 않는다. 자기관리가 잘 되는 건 나보다 연륜이 있기 때문인 걸까 성격인 걸까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일거다.
나는 글쓰는게 어렵다. 늘 좋아했지만 늘 어려웠다. 곧잘 감상에 빠져버리는 성향도 문제지만 성격이 급한 탓도 있다. 써 내려가놓고 후회하기 일쑤였다. 일기장에 미니홈피에 블로그에 꼬박꼬박 쓰던 일기 빈도가 줄기 시작한 건 그런 후회가 짙어지면서일 거다. 돌아본 나의 글들이 모두 너무나 하찮아서.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이런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며 청탁 원고도 쓰곤 했지만, 부끄러움은 여전하다. 나만 읽는 일기도 창피한데 누군가에게 읽힐 글을 다시 쓴다는 것. 괜찮을까? 반려인은 나에 비하면 쉽게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 점이 참 멋지다. 감수성은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 감상적이지 않기란 쉽게 갖추기 힘든 미덕이다. 나는 그의 곁에서 자주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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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 화낼 때는 불같고 짜증낼 때는 한없이 못됐지만 무정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예전에 친구가 내게 이 사람을 왜 좋아하냐고 물었다. 난 한참 고민하다가 다정해서? 했더니 친구는 의외라고 하며 취향이 잘 맞아서일 줄 알았다고 했다. 그것도 분명 중요한 요인이지만 취향 때문만이었다면 그와 여기까지 오진 못했을 것이다. 반려인 전에 만났던 사람들도 취향적 접점은 충분했으니까. 나는 이 사람에게 어쩌다 빠졌는지 한참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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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태도로 영원한 사랑을 믿는 사람들과 유사한 순진함을 가졌던 것 같다. 누굴 만나든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했다. 언젠간 헤어질 거란 믿음으로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에 충실했다. 어차피 지나갈 거니까. 그런데 그런 믿음을 단념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이 사람을 만났고 이 사람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모종의 단념이 일어났다. 처음은, 누군가와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고 다음은 이 사람과 헤어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노래가 나오기 직전 1년 전체가 이 노래를 위한 시간이었던 것만 같다.
그 시절을 기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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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주된 계기는 이렇다: 나는 읽지도 않을 잡지 폐간되지 말라고 구독하고 싶고, 내 아이돌 서포트 하는 데에 익명으로 총알 쏘고 싶고, 가까운 지인이 공연할 때 초대권 대신 입장료 내고 들어가고 싶고, 한달에 얼마씩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것 하고 싶어서. 모두 지금도 어찌저찌 하는 일들이지만 좀 더 쉽게 더 많이 하고 싶어.
그러니까, 돈을 안 써도 되는 곳에 쓰고 싶다. 내게 필요하거나 내가 원하는 재화 혹은 서비스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 말고, 그냥 돈을 쓰기 위해 쓰는 행위가 하고 싶다. 어쨌든 그건 나에게 행복과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일이니까 뭔가를 구매하는 셈이긴 하지.
가끔은 한 달에 한 곡도 다운 받지 않으면서 다운로드권까지 정기결제 해놓고 음원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나의 사치라면 사치다. 처음 그걸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소한 사치가 나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옛날 어른들은 이런 욕망에 대해 돈이 남아나냐고 타박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것 다 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남으면 참 좋겠고, 이런 것 하느라고 돈이 안 남으면 그것으로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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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가을을 절정으로 타고 있는 와중에 일이 예상 밖으로 늦게 끝나서 열 한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우울을 씹으며 집에 가고 있었는데 애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날 만나러 오는 길이라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내가 얼마나 우울했는지조차 싹 잊어버렸다. 애인은 한시간 운전해서 나와 한시간을 보내고 다시 한시간을 운전해서 갔다. 우리는 요새 롱디 생활 중이고, 둘 다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본다. 그래도 이렇게 행복하다.
며칠 째 애인표 스파게티와 새우튀김 노래를 부르다가 오늘 즈음 까먹고 있었는데, 오늘 또 날 만나러 분당으로 온 애인의 차에 올라타니 갑자기 애인이 내게 불쑥 접시를 내밀었다. 그리곤 보온병을 주섬주섬 열었고 그 안에서 킹슈림프가 잔뜩 들어간 파스타를 쏟아냈다. 내가 사랑하는 알단테. 나는 비명을 지르며 차 안에서 파스타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이상하게 연락이 안 되더니 이거 하고 있었구나. 파스타는 거기까지 오는 동안 많이 불었지만 여전히 따뜻했고 거짓말같아도 세상 어떤 파스타보다 맛있었다.
우리가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왔다. 그라나다에서 하루 머물렀고 프리마베라 사운드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본 공연들은 대체로 좋았으나 역시 헤드라이너들이 이름값을 했다. 내가 살면서 욘시를 세번씩 보고 시규어로스와 라디오헤드의 공연을 두번씩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시규어로스는 내한공연 때보다 훨씬, 훨씬 좋았다. 그때도 더할나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라디오헤드는 새 앨범 영향인지 지산에서 봤을 때보다 락적이고 라이브 느낌이 물씬 나서 좋았다.
그리고 크립을 들었다.
그 외에 테임임팔라, 애니멀콜렉티브, 익스플로전인더스카이, 도터가 특히 좋았다. 내한했을 때 못 봤던 팀들을 여럿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지난번에 유럽으로 여행갔을 때에는 한국이 그리워질 때 즈음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와서 좋았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새로운 삶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고, 돌아와서 좋은 것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 뿐이다. 여행이 끝나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는 말 그대로 내 현실을 일시정지시킨 채 잠시 외유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