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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건강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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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07 슬픔 대신 죽음이 나를 찾아주었으면
- 2015.09.02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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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을 위해 뮤직비디오 세 편을 만들고 싶었다
그 중 두편이 나왔고, 나머지 한편은 내가 만들 생각이다
공개시기는 올해 하반기 즈음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하면 하는거고 안 하면 안 하는 거니까.
Happy Friday는 뮤직비디오를 위해 가장 오랫동안 생각했던 노래다
그러니 더더욱 직접 해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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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stock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세월이 오래 지나도 나는 아마 오늘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가장 먼저 쓴 노래가 가장 마지막으로 완성되던 순간을, 그 순간을 위해 줄곧 기다려온 지난 몇년이 스쳐가던 5분을.
어떤 무대에 발을 디디면 이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까. 무엇인가에 책임을 다 하고 그것을 종결지었다는 이 느낌 너무 오랫만이라 낯설고 벅차다. 깊은 바다로부터 퍼져온 파도같은 이 감정의 동요가 일어난 순간이 최종 마스터파일을 듣거나 발매된 음반을 받아들거나 하는 순간이 아니라, 이 노래 한곡이 내가 언제나 그려왔던 그 모습으로 성장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라는 점이 얼떨떨하다.
눈을 질끈 감으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누구에게도 나를 사랑할 이유같은 것은 없다
내가 있는 곳은 진창이고, 되도록 아무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나의 윤리일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삶이나마 내 것이라고,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치는 발버둥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지독한지, 내 악력은 얼마나 징그러운지
코와 입으로 진흙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에, 악취를 감추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죽고 싶다
흔적 없이, 마치 한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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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가든을 다시 한번 보았다. TV로 방영될 때 한번 재미있게 보았는데, 문득 다시 보고 싶어져서 전편을 다운받아 이틀만에 주파했다. 그런데 얼마나 좋았는지, 멈추지 못하고 한편 한편 넘어가는 순간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여태까지 본 부분을 다시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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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서로 완벽하게 다른 배경을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져 어떻게 서로에게 길들여지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연애물이다. 잘 다듬어진 면도날처럼 예리한 김주원의 말들에 길라임이 베이고 상처입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둘은 서로 닮아간다. 길라임은 강해지고, 김주원도 알지 못하는 김주원을 익히고 알아간다.
그리고 김주원.
김주원이라는 캐릭터의 가장 전복적인 부분은 그가 결국 사랑하는 여자와 살기 위해 가문에서 버려진다는 것에 있다. 그는 시종일관 이 말로를 인식하고 있고, 그래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길라임과의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결국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물론 이건 드라마니까, 가문에서 버려져도 김주원은 돈이 많다. 그러나 그의 돈 많음이 길라임을 신데렐라로 만들지는 않는다. 길라임은 김주원을 만나지 않았어도 다르지 않았을 형태의 미래를 그와 함께 산다. 이 부분은 두 사람이 지금 시대에 상당히 진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길라임은 젠더적으로 매우 멋진 여성캐릭터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이런 설정의 밑받침이 된 김주원의 전복성이 한가지 더 있다. 이 나머지 한가지가 김주원을 여타 재벌가 자제들보다 훨씬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건 김주원이 길라임의 모든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기만 하는 남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의 사랑에는 많은 연인들의 사랑이 그러하듯 무조건적인 맹목성이 있다. 그러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랑과는 별개로, 김주원은 길라임에게 자신에게 맞춰달라, 노력해라 요구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잘사는 남자가 가난한 여자에게, 그래 나는 너와 다른 세계 사람이니까 너는 이런 것을 상상도 못하겠지, 나는 다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 괜찮다, 내가 무조건 받아들여준다, 너의 구멍난 양말도 사랑한다, 내가 너를 내 수준으로 끌어올려주겠다, 하는 식의 사고방식이 여기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김주원은 자신을 만나러 나올 때 망가진 가방을 들고 나오는 길라임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그녀가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성인이라면 너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내 상황도 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화를 낸다. 이 지점에서 김주원이 길라임을 자신의 은총을 받아야 할 신데렐라가 아닌, 본인과 상호존중을 전제로 관계맺는 대등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점이 이 남자로 하여금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의 프린스챠밍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맞춰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며 맞춰가는 현실의 연애다.
김주원이, 그를 만나러 나온 길라임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인 줄 아는 이상, 나를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단 5분이라도 내 생각을 했다면 그런 가방을 들고 나와서는 안됐다고 할 때 그는 길라임이 몇백만원짜리 명품백을 들고 나오길 기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끈이 떨어질만큼 낡지는 않은, 해질대로 해져 너덜너덜한 모습의 가방이 아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텐데, 그 정도도 해줄 수 없나 싶어 서운했던 거겠지. 정말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해줄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때의 길라임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김주원을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옷장에 있는 옷을 다 끄집어 내어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생전 하지도 않았던 액세서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나온 모습이 그 모습이었고, 단지 그녀는 자신이 들고 나가는 가방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의식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래, 그 가방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가방이었을 수도 있다. 김주원이 생각하는 상식과 기준이 길라임의 상식과 기준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이다. 그래서 둘은 모두 의도치 않게 서로 상처입히고 상처입는다. 극중 김주원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게 최선입니까?"하고 묻는데, 그게 그들에게 정말 최선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하직원들보다 자신이 훨씬 능력있고, 좋아하는 여자보다 자기가 훨씬 돈이 많다는 사실이 자신과 그들로 하여금 아예 다른 기준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다른 세상에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여기서 발견되는 또 다른 좋음포인트는 길라임이 당연히 자신에 대해 생각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김주원의 밑도끝도 없는 자신감이다. 이 자신감은 물론 자신의 잘남에 대한 자기지각과 그것이 누군가에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몰지각으로부터 비롯되었을 뿐 상대방(길라임)의 감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데, 역으로 이 근자감이 길라임에게는 매력으로 어필된다. 이 드라마를 보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그랬듯. 역시 사람은 일단 권리를 주장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알아간다. 하루 종일 상대에 대해 생각하며, 그리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치지 않고 그녀를 쫓아다니고 바라보며 김주원은 조금씩, 길라임은 길라임의 방식대로 안간힘을 쓰며 자신을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상처주었던 자기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스스로 상처입는다. 그 와중에도 길라임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다가서는 그의 모습에 길라임은 김주원의 전경, 즉 그의 편견과, 날카로운 말들, 그리고 무례함과 거만함 너머에 있는 그의 마음을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동시에 삶의 많은 부분을 전시하며 살아가는 김주원을 위해 자신이 맞춰주어야 하는 부분이 어느 선인지 역시 길라임이 알아가는 동안, 김주원은 길라임이 자신에게 해줄 수 없는 일들과, 그 대신 자신이 맞춰줄 수 있는 일들을, 그리고 자기가 인정하거나 양보해야 하는 일들을 알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한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연인들이 그토록 절절한 동시에 시원시원한 해소감을 주는 까닭이다. 정말 좋았던 점 중 하나는 그들에게 오해가 생기거나, 싸우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길라임이 돌아서서 집에 가면 어김없이 김주원이 집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거나 쫓아와서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었다. 싸웠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자중해야 할 것 같아서, 상대가 날 보고싶어하지 않을까봐, 오해가 생겼으니까, 따위의 어떤 이유도 핑계가 되지 않는다.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주고받는 것이고, 보고싶은 것은 보고싶은 것이니 일단 만나야 한다는 것이 김주원의 신조다. 집에 가면 쫓아가고, 돌아서면 불러세우고, 등지고 서면 앞으로 돌아가서 마주보고 선다. 뭐든지 다 하고 끝까지 한다. 누구보다 기동력이 좋은 것은 액션스쿨 사람들이 아니라 김주원 본인이다.
그러니 이들의 사랑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며 깊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서로를 알아갔고 상처 위에 상처를 덮으며 멈추지 않고 다가섰다. 마음은 그 과정에서, 그 결과로 깊어졌던 것이다. 내게는 이것이 연애다. 머리좋은 김주원은 매우 빠르게, 열심히 계산하지만, 결국 그 모든 계산이 무용지물이 되는 곳에 도달하고 만다.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받아야 하고, 혹은 그쪽이 일방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더 망설이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길라임에게, 김주원은 자신의 마음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대신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이 경제적 절대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이에 자기 몸사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조차 없이 길라임을 위해 권력을 휘두른다. 우리가 악당에게서 언제나 보아왔던 모습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이지만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매우 똑똑하게, 선택된 사람일지언정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아낌없이 망설임없이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한다. 그것을 도구로 마음을 얻으려는 얄팍한 시도가 아니라, 마음을 주든 말든 해주고 싶고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는 자신의 욕망으로. 마치 동화 속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드라마 속 재벌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 설레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이 역시 현실의 연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이 많기만 한 애인은 필요 없다. 돈을 내게, 제대로 잘 쓰는 애인이 좋은 것이다. 나를 혹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수고스러운 억지노력이 아니라, 본인이 기쁘기 위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나는 이런 애인상이 판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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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인들은 우선순위가 확실하다.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김주원은 처음 길라임에게 잘난척하며 말한다. 어차피 우리는 끝까지 갈 수 없는 사이니 없는듯 있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라고. 가차없이 그런 말을 잘도 해놓고 끝에 치닫자 그는 자신이 물거품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시작해서 진행되고, 끝을 맺기까지 그들의 우선순위는 변하지만, 변한 우선순위조차 확실하다. 게다가 이미 처음부터, 마음이 시작된 순간 우선순위의 변화는 명백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시작된 마음은 멈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
김주원이 길라임에 대한 기억을 잃었을 때, 길라임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순식간에 그는 다시 길라임에게 빠져든다. 길라임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그랬듯. 다시 만나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이 진부하고 판타지적인 설정은 그러나 사랑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든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데에는 어떤 배경도, 어떤 계기도 변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자라난 배경이 현재 그들의 인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겠으나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았든, 형성된 인격만이 그 자체로 한 사람을 대표한다. 이 외의 다른 배경과 환경은 부수적인 요소로 남을 뿐이다. 그러니 맨몸으로 마주섰을 때,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났기 때문에, 될 인연이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이루어진다는 것. 이 둘의 인연은 관계에 대한 표상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표정이며 걸음걸이, 제스쳐에 말투까지 닮아가는 두 연인의 모습. 멋져멋져. 이걸 운명론이라고 한다면 운명론인 거겠지.
몸이 바뀌는 설정이 내게 썩 재미있는 장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주제를 이런 방향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 설정은 꽤나 상징적이다. 서로 자리바꿈을 경험해보면서 너무나 다른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내가 너의 입장에 서 보는 것. 이것은 연인들의 이상이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다가서려고 하는 곳. 서로 그렇게 멀었던 길라임과 김주원은 상대방의 자리에 서보며 서로를 조금씩 더 알게 되고, 한발씩 더 다가서며 거리를 좁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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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좋았던 것은 이 드라마에는 악역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악역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극중 길라임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모두 매우 합리적이다. 사랑에 관한 한 그들은 이성적이지 못하게 굴고, 유치하기도 하고 감정에 휩쓸려 흔들리지만, 결국에는 누구도 까닭모를 악의를 품지 않으며 상식의 선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동기에 따라 확실하게 행동한다. 그래서 악역으로 등장했던 윤슬은 곧 조력자로 변모하고, 호시탐탐 사장직을 노리던 박상무는 욕심과 호기심에 따라 움직이며 실수하고 자괴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김주원은 곧 그를 구제한다. 끝까지 악역으로 남았던 김주원의 엄마는 그녀 나름의 신념과 자존심을 지키는 일관된 인물이다. 그녀의 자존심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그 마저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시크릿가든은 놓치지 않는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정신줄 놓고 바보같은 소리를 하거나 바보같은 행동을 할 때, 어김없이 현명한 조언을 해주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는, 든든한 서포트가 되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착하게도 그들의 말을 충분히 귀담아 듣고 참고한다. 그들이 앓으며 울 때는 그럴만 할 때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답답하게 구는 캐릭터가 없다. 게다가 조력자 역할을 하는 조연들에게도 각자의 스토리가 있다. 그 이야기들은 묘사되기도 하고 암시되기도 하는데, 비중은 다르지만 누구의 이야기도 어설프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김주원과 길라임의 인물/관계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아도 이 드라마는 상당히 건전하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 속 여자들은 모두 일을 한다. 길라임은 재벌가 아들과 결혼을 하고도 스턴트우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윤슬의 미모관리는 칼같은 자기관리일 뿐, 남자들에게 어필하여 자신을 갖다 바치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 심지어 김주원의 동생인 김희원조차도 주식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며, 집안 재산에 기대 살 생각 없음을 단호하게 밝히는 여자로 그려진다. 이 드라마 속 여자들은 외부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애인들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고 성공해낸다. 가방으로 아들을 패는 오스카 엄마의 손목을 잡아채던 윤슬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그리고 길라임. "아드님 저 주십시오, 제가 평생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는 말을 여자 주인공이 하는 드라마가 이 땅이 몇이나 있나?
이 드라마의 여자 캐릭터들, 길라임과 윤슬, 길라임과 김희원, 길라임과 임아영 들의 대화씬도 마음에 와닿는 순간이 무척 많았다. 그들은 단순히 남자 하나를 두고 싸우는 여자들의 대화나, 주인공의 그림자에 가려져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으면 존재의 생기를 잃어버리는 "주인공친구"와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우정, 비슷한 경험에서 비롯된 깊은 공감과 연민, 이해와 배려, 서운함과 애정 같은 것들이 이 여자들의 관계에는 있다. 주된 시청타겟/독자층으로 여성을 겨냥하는 참 많은 드라마나 순정만화에서조차 번번히 놓치는 것들인데. 나는 이 여자들이 서로의 가족이 아니라는 점도 매우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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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죽을 병, 감춰졌던 과거의 인연, 훼방꾼, 부모님의 반대, 신분격차, 판타지, 기억상실증까지 한국 드라마가 가진 모든 클리셰는 다 가지고 있는 드라마다. 그런데 이 클리셰들을 조합하여 이토록 여운이 긴 드라마를 만든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어찌나 대단한지 다 보자마자 1회를 다시 틀어보았을 정도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복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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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이종석을 처음 알았고 많이 좋아했다. 시크릿가든이 끝나고 몇년이 지난 뒤에야 이종석은 너목들을 통해 전국구 스타가 되었지만, 지금 다시 보는 시크릿가든에서의 한태선이 이종석의 리즈시절이라고 여전히 느낀다. 나는 워낙에 하지원이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하니 주연진은 차치하고도, 김사랑도 너무 예뻐 눈호강하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건강한 사회에 대해 뼈아픈 배움을 얻고 있다. 건강한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회가 아니다. 구성원 중 누군가가 발을 헛디뎠을 때, 삐딱선을 탔을 때, 무엇인가 비일상적이고 잘못된듯 보이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곳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갈린다.
책을 읽을 시기가 아닌데 책을 읽고 있다.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과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다. 정말 지겹다. 예전에는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논리와 의식의 흐름에 손에 땀을 쥐고 읽었을 것 같은데, 지금 마음가짐 때문인지 나의 생활고때문인지, 돈많고 시간많고 할일 없는 사람의 지랄같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홍진에 파묻힌 사람이 되어가나봐, 자조하면서도 사실 별로 슬프거나 안타깝지 않다. 지금 마음같아선 내가 초롱초롱하고 기꺼운 마음가짐으로 읽었더라도 이 소설이 지겨운 종류의 소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오히려 재미있는 것은 책을 읽기 싫어서 내용정리나 핵심정리를 해놓은 해설을 찾아보느라고 위키에 들어갔다가 발견한 어떤 사실이다. 차페크는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고안해낸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실은 평범한 인생을 쓴 카렐 차페크가 아닌 그의 형 요세프 차페크가 만든 단어였다고. 자신과의 합작 안에서 형이 고안해 낸 단어라고, 나중에 카렐이 덤덤한 탄원서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로봇이라는 단어의 어원이었다. 단어 자체로 '노예', 비유적으로 '고된 일'을 뜻하는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로보타(robota)에서 온 말이다. 로보타의 어원은 고 교회 슬로바키아어 라보타(rabota →노예 상태, 현대 러시아어로 '노동')이며, 이는 인도-유럽어족 어원 orbh-에서 유래했고, 아르바이트(독일어: Arbeit →일, 노동)도 같은 어원이다. 로봇도 알바생도 노예노동이네, 노예노동. 어원부터 비릿하다.
아까는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화병이 날 것 같아 뭐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씁쓸하고 허탈한 기분 뿐이다.
오늘을 포함해 날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부쩍 많이 만나는 요즘이지만, 지난주에 겪은 한 문학하는 선생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토록 아름다운 시를 읽고 그토록 좋은 수업을 하는 선생이 어떻게 그렇게 졸렬하고 더러울 수 있을까. 아니, 사람은 더러울 수 있지.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도 되는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은 단순히 교양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얼마나 절망감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고 나중에는 문학 전반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문학은 정말 아무도 구원할 수 없구나. 정말이지 무용하고도 무용하구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턱대고 믿고 따르고 좋아하고 싶은 선생님이라는 존재들이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겪으면서 너무 진이 빠지고 허탈하다. 이제 선생님들과 사담은 나누고 싶지 않다.
무지했던 나에게 쉼보르시카를 알게 해준 그 치는 "어떤 사람들은 참 불쌍하지, 어떻게 쉼보르시카도 모르고 살까" 하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 말부터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쉼보르시카가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넘어가고 말았지. 그놈의 곤조가 뭔지. 문학하는 사람이 곤조를 부리는 것이 더 나쁜지, 아니면 일하면서 일보다 더 곤조를 우선시하는 사람이 더 나쁜건지 판가름하기 참 어렵다.
요즘 나는 어떠냐면 이렇다. 집을 나서면 하루에 한번씩 싫은 사람을 만나 싫은 일을 겪는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들이, 내가 어려서 일어난 일인지, 내가 여자라서 겪는 일인지, 내가 삐뚤어져서 느끼는 일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요새 싫은 일들을 너무 많이 겪고 있다는 것. 이게 앞으로 평생 이어질 일인지, 아니면 잠깐있을 일인지 모르겠다.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
스탠드를 오래 켜두었다 끄면 찾아온 어둠 속에서 전구는 연한 형광 초록빛으로 빛난다 한동안 그리고 눈이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질 때 즈음이면 빛은 사라져 있다
무엇이라도 나를 좀 빨리 죽여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 내 삶에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일이었던 사람. 그런 사람 생각. 어떤 무엇을 떠올리든 그 앞에 어른거리는 엄마 얼굴. 그런 생각.
지금 애인과 헤어지면 이후 누구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헤어지면 지난 4년이 짧고 뻔했던 꿈처럼 여겨질 것 같다. 한 순간도 나는 안심했던 적이 없었고, 한번도 우리가 현실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내 옷이 아닌 옷을 걸친 것처럼, 나는 애인이 늘 낯설고 불안하다. 몇번을 보아도 그 얼굴인데, 이제는 속눈썹 기장도, 점들의 위치와 살갗의 감촉도, 품의 냄새도 모두 아는데, 그 모든 것이 숨쉬듯 내 것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인 걸까. 당신과 나의 생김새가 너무 다르기 때문일까. 당신이 나를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내가 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백번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하면 천번씩 말해주면 좋겠다. 인사 없이 헤어지면 금새 돌아와서 안아주면 좋겠다. 무너질듯 울고 있으면 그칠 때까지 긴 시간도 곁을 지켜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러면 조금은 덜 불안할까. 이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면. 그러면 조금은
애인의 애교가 때로 얼마나 큰 기쁨을 주곤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히, 하는 단음절 문자에 눈물이 왈칵 솟구칠 정도로 좋은 순간이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상황은 언제나 싫지만, 미안하다는 그 말에서 묻어나는 따뜻함, 걱정, 그리고 애정같은 것에 내가 더, 훨씬 더 미안해지곤 한다. 보고싶은데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날. 그런 시간이 이토록 쓸쓸하고 견디기 싫은 것을 보니, 당신과 원거리연애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그만 하고 싶다.